□ 변산(소운호마을 - 비봉 - 제단 - 320.8봉 - 삼신산(갈마봉) - 망포대 갈림 - 신선마을터 - 신선봉 - 노랫재(대소고개) - 대서마을 - 사자동
o 일 시 : 2016. 6. 18(토)
o 거 리 : 18.0㎞
o 산에 머문 시간 : 08:48분
o 날 씨 : 맑고 운무
o 누 구 랑 : 남도산사랑
o 교통편 : 버스(광주 06:30 ~ 소운호마을 07:50) 1시간 20분 소요
o 산행개요
소운호마을(07:53) - 도심봉(08:18) - 비봉(08:28) - 제단(08:43) - 비봉(09:22) - 320.8봉(10:03) - 삼신산, 갈마봉(11:11) - 망포대갈림(11:58) - 신선마을터(13:03) - 신선봉(13:31) - 노랫재, 대소고개(15:05) - 대소마을(15:20) - 재백이 다리(15:39) - 직소폭포 전망대(15:38) - 사자동(16:42)
선대(神仙台) 옛터 | ||
| ||
일심교는 '유불선 동서학 합일 갱정유도'를 내세우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유교로 뭉쳐질 것을 믿는 강대성이 세운 신종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생활관습을 그대로 좆아 사서삼경을 읽고, 상투, 댕기머리에 흰옷을 고집하며 신학문, 현대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지리산으로 이주해 갔다. 지금의 그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바로 그 곳이다. 1996년 경까지만 해도 추석 때 신선대로 성묘 오는 그들(은재필 씨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묘를 모두 이장해 가 내왕이 끊겼다. 위의 사진은 그 당시 신선대 마을 입구와, 마을 서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뿌리깊은나무"에서 퍼왔다. 사진/김수익[부안21 편집부] 김길중의 '오! 변산반도' 신선대(神仙臺)옛 터 월명암(月明庵) 뒷등 낙조대에서 西海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분초대, 망포대를 지나 북재를 넘으면 신선대(神仙台 486m) 루대(樓台)에 서게 된다. 신선들이 살아서 신선대라 하였는지..., 어쨋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두건에 도포차림으로 세상과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기들의 방식에 의하여 구름을 벗하고 유수를 지근한 채 공․맹자의 도심(道心)이 인간 도리의 최선의 길임을 주장하며 신선처럼 살다가 무지한 속인들의 이념분쟁으로 북에서 보낸 김 신조(청와대 습격) 일당의 민간 학살사건(이용복)이 비화되어 오지인들의 보호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이곳 사람들도 영문을 모른 채 자기들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이 정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경상도 청학동 또는 타지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1977년도 경에 보안면 柳川初等學校에 근무할 당시 이곳 도인(道人)들과 가끔 교류가 있었고 서로 오고 간 정이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곳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가끔 이곳에 들려 한바퀴 옛터를 돌아보고 회상에 젖어 본다. 神仙臺 옛터 동남쪽 월태화용(月態花容) 기령(氣靈)이 운집(雲集)한 터 산수진경(山水眞景) 무릉도원(武陵桃源) 높은 터에 세워놓고 흐린 세상 취한 인간 바른 도법(道法) 깨우치려 흰 두건 도포 자락 신선(神仙)처럼 살았는데 무단한 정치(政治) 논리 백성(白姓) 보호 미명 하에 굴원이 내 몰리듯 당신들도 추방(追放)을 당했지요 초립동(草笠童) 글 읽던 도량(道場)엔 벽오동 만 쓸쓸하고 홰나무 우거진 집터 옛날 자취 완연하니 그 옛날 지인(知人)생각 왠지 마음 허전하여 산새 우는 옛 터에 아쉬운 정(情) 남겨 둔 채 반야월(半夜月) 외기러기 울며 북재(敲峙) 넘어 가듯 흐르는 계곡 따라... 해명 태명 내려왔소. 월태화용(月態花容) -달 모양 꽃 모양의 집터 무릉도원(武陵桃源)-도연명(陶淵明)이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기술된 선경(仙境) 무릉의 어부가 발견 하였다는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초립동(草笠童) - 풀로 만든 갓을 쓴 젊은 사내 신선대에서 邊山 小松 金吉重 |
대소 구시둠벙 |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대소 마을에 있는 봉래1곡 대소, 2곡 직소폭포, 3곡 분옥담, 4곡 선녀탕 등 5곡, 6곡~9곡을 연출하고 백천계류에 합류한 다음 서해로 빠져나간다. 이 계류가 바로 변산을 대표하는 계류로 봉래계곡, 또는 봉래구곡이다. 대소마을 사람들은 봉래 1곡인 '대소大沼'를 ‘구시둠벙’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곳에 가보면 구시둥범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금새 알 수 있다. 소(沼)가 마치 말의 구유처럼 기다랗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을 이름도 ‘大沼’로 표기해 놓았다. 이에 대해 인간문화재 대목장 고택영 선생님이나 대소 마을 사시는 조문기 선생님은 역정을 내신다. 이 지역은 신선이 노니는 곳으로 거의가 가무(歌舞)와 연관된 땅이름들이라고 하신다. 문헌에 大沼로 표기된 대소 마을은 퉁소를 뜻하는 ‘大蕭’이고, 북재는 북고(鼓)자를 써서 ‘鼓峙’, 그리고 석포에서 오르는 대소 마을 들머리 몬댕이는 노릿재(노랫재, 歌峙), 그런가하면 노릿재 서쪽에 둘러쳐진 바위는 병풍바위, 또 여룬개 쪽 산등성에 돌출해 있는 바위 이름은 ‘시루봉’으로 시루떡처럼 생겼다. 또, 대소 마을 동북쪽의 바위는 장구바위, 징바위... 이쯤 되면 병풍 둘러놓고 떡상 차려놓은 다음 피리불고, 장구치고, 북치고, 장구치고, 노래하고, 춤추고...과연 신선이 살만한 곳이다... 어쨌든 신선대는 부안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비경 중의 하나다. 4계절 모두 비경을 연출하지만, 비 온 후의 신선대는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다. 이 비경에 반해 예부터 이곳엔 은둔자들이 많았다. 지리산 청학동으로 간 신선대사람들(도군)도 그 중의 하나다. 지금도 이곳에서 몇 분이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
봉래구곡(蓬萊九曲)
「동국여지승람」에 변산(邊山)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능가산(楞伽山)이라는 문헌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변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여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고부의 두승산(斗升山)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았다. 변산을 대표하는 계곡 이름도 봉래계곡으로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망포대, 분초대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해발 150여m에 위치한 산곡의 분지마을 대소(大蕭)에서 만나 직소폭포, 분옥담, 선녀탕 등의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며 굽이굽이 흘러 서해로 빠진다. 이 계곡의 빼어난 曲 아홉을 ‘봉래구곡(蓬萊九曲)’이라고 한다.
蓬萊一曲 : 대소(大沼)
봉래1곡인 대소(大沼)는 대소(大簫)마을 아래에 있다. 소가 마치 말의 구유처럼 기다랗게 생겨 ‘구시둠벙’이라고도 부른다.
蓬萊二曲 : 직소폭포(直沼暴布)
변산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직소폭포는 채석강과 함께 변산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변산팔경 중의 일경이기도 하다. 20여m의 암벽사이로 흰 포말을 일으키며 쉴 새 없이 비류직하(飛流直下)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소(沼)를 만든다. 이 소를 실상용추(實相龍湫)라고 하며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실상용추를 맴돌며 잠시 숨을 고른 물살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분옥담, 선녀탕을 만들며 서해로 달려간다. 1932년에 간행된 부안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에 의하면 직소(直沼)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고 하였다. 또 <한국지명총람> 전라북도 부안군 편에는 “가물면 원님이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는데 물속에 산 돼지를 잡아넣는다”고 하였다. 이는 용신(龍神)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서 비의 신, 농업의 신이라 믿는 용에게 직접 비를 축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직소가 빼어난 경승이다 보니 예부터 표암 강세황, 육당 최남선 등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여러 시문이 전한다.
蓬萊三曲 : 분옥담(墳玉潭)
직소폭포 30여m 아래에 있다. 실상용추(직소폭포)를 맴돌며 잠시 숨을 고른 물살은 다시 아래로 흘러 또 한 번 폭포가 져서 층층한 일담(一潭)을 이루니 이른바 분옥담이다.
蓬萊四曲 : 선녀탕(仙女湯)
푸른 정화수 속에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선녀탕은 분옥담 아래에 있는 깊은 소이다. 석공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탕의 깊이가 한 길이 넘는다. 혹 물길을 가소롭게 생각하다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곳이다. ▲봉래구곡 암각자-동초 김석곤 글씨
蓬萊五曲 : 봉래곡(蓬萊曲)
1곡 대소, 2곡 직소폭포, 3곡 분옥담, 4곡 선녀탕을 흐른 물이 구절양장으로 꺾이고 감돌아 반석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머무는 듯 넘나드는 이곳이 5곡 봉래곡이다. 그러나 이곳을 ‘봉래구곡’이라고들 부르는데, 이는 9곡 중 가장 중심지인 관계로 어느 때부터인지 9곡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봉래구곡이라 불리게 된 듯하다. 물이 흐르는 암반 위에 각자(刻字)된 봉래구곡(蓬萊九曲)이라는 글씨는 태인 사람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의 필체라고 전한다.
蓬萊六曲 : 금강소(金剛沼)
봉래곡을 경유한 푸른 물이 산 그림자를 머금고서 적당히 괴여 소(沼)를 이룬 곳이 제6곡 금강소이다. 등산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탁목(濯沐)과 탁족(濯足)을 하던 곳으로 소 바닥에는 수 억겁 세월에 연마된 하얀 조약돌들이 물살에 어리어 반짝인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금강소라 하였나 보다. 사자동 마을 아래 중계다리 가는 길목에 있었던 이 소는 부안댐의 축조로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蓬萊七曲 : 영지(影池)
금강소 아래에, 백천내 바로 위에 위치하며 물이 머무는 소(沼)가 매우 넓고 깊으며 여름에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즐기는 곳으로 이곳으로부터 10여 리가 떨어진 쌍선봉과 월명암 시주승(施主僧)이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모습의 그림자가 이 못에 비친다하여 영지(影池)이라 하였으니 맑은 물에 숲마저 우거진 명소가 지금은 부안 댐의 축조로 그 흔적이 사라져 아쉬울 뿐이다.
蓬萊八曲 : 백천(百川)
대소, 직소폭포, 분옥담, 선녀탕, 봉래곡, 금강소, 영지를 달려온 물은 어수대, 창수동 계곡, 유동, 거석리, 청림, 가마소계곡을 달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서운암(棲雲岩) 계곡 물줄기와 맞닥뜨려 합수(合水)하니 이곳이 바로 백 줄기의 물이 만난다는 바로 백천(百川)내이다. 8곡 백천은 지금의 중계다리 부근이다. 8곡 백천 역시 부안댐의 축조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蓬萊九曲 : 암지(暗池)
암지는 봉래구곡의 마지막 곡인 9곡이다. 잠두(누에머리,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 천연기념 제124호 꽝꽝나무군락지 부근에 있다.) 앞에 있었던 소로 부안댐이 축조된 후 물속에 잠기었다. 댐이 만들어지기 전, 음지를 경유한 물은 중계에서 새재골 물과 합쳐진 다음, 또 마상치 부근에서는 남여치 쪽에서 흘러 온 물과 만나 군막동, 해창을 달려 서해로 빠진다.
![]()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은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444번지에서 아버지 연추(演秋)와 어머니 여산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처안(處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오(訥吾)이다. 말년에는 팔조거사(八槽居士), 소요처사(逍遙處士)라는 별호도 사용하였다. 그는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 새기기를 즐긴 기인(奇人)으로, 변산의 봉래계곡에 ‘봉래구곡(蓬萊九曲, 500cm⨯170cm)’이라 초서로 새겼다. 글씨 한 자의 크기가 사방 1m가 넘는 대형이다. 그는 이 외에도 정읍 내장산 불출암 서편에 ‘내장풍악(內臟楓嶽)’, 두승산 정상 암석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 정읍시 북면 칠보산 보림사 주변에 있는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의 서당지 암벽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정읍시 산외면 상두산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유수불부(流水不腐)’, 모악산 수왕사에는 ‘무량굴(無量窟)‘이라 새겼다. |
/ 김길중_邊山小松
"4대 사찰 중 으뜸이던 풍모는..." [부안 문화재 답사-37]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 '실상사지' | ||
| ||
부안실상사지 종 목: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 명 칭: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분 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수량/면적:1,696㎡ 지정(등록)일:1986.09.09 소 재 지: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164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실상사 관리자(관리단체):실상사 내소사(來蘇寺), 선계사(仙溪寺), 청림사(靑林寺)와 더불어 변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던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689년(신문왕 9년)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 제4대 세종 임금의 형인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궁재로 중수하고, 또 숙종 때 영허선사(映虛禪師)가 중수하였다. 대웅전, 나한전, 요사, 산신각 등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고려초기 작품인 불상과 고사경, 고인경, 화엄경소(華儼經疎) 등의 경판과 효령대군의 원문 등 중요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원불교 창교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실상사 옆 실상초당에서 원불교 교법을 마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이오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1986년 9월 9일 실상사터와 그 주변 16,725㎡가 전라북도 기념물(제 77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 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내장산, 금산사, 변산 등지의 남한 각지를 여행하고, 1926년에 기행문 심춘순례(백운사 간)를 출간했는데, 아래는 내소사, 직소폭포를 지나 실상사를 둘러본 후 남긴 글이다. "…곧 실상사가되니 영락한 지 오래다. 4대 사찰 중 으뜸이던 풍모는 겨우 그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모습으로 볼 뿐이다. 퍽 크게 만든 관음상인데 잘룩한 허릿매와 넓다란 옷자락과 너그럽고도 어우러진 모습이 고려조 초기의 것임이 의심이 없으며, 절에서 전하는 바로는 서역으로부터 배를 타고 원암 앞바다에 와 닿았는데, 처음 수상한 배가 들어오니 주민들이 다투어 붙잡으려 하였지만 속인에게는 물러나더니, 혜구두타가 나가니 저절로 달려들어 비로소 그 위에 앉으신 이 관음상을 모셔 내리고, 그로 인해 이곳을 석포(石浦)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다. 수십 년 전까지도 당우가 여러 채 더 있고 불상도 오래된 것이 많았었는데, 집들은 불타 없어지고 부처는 많이 파손되어 이렇게 소잔하여졌다 한다. 그 중에서도 한 불상은 보화가 많이 들어있다 하여 일찍이 도적이 들었었다. 도적은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자 실망하고 돌아갔으나, 그 복장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과 고사경(古寫經) 및 고인경(古印經)이 수백 권 나왔는데, 더러는 도난을 당하고 아직 남아 있는 대부분은 높이 쌓아 두고 있다. 대개는 해인본(海印本)의 제종경론(諸種經論)이요, 그 밖에 고려판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疎) 같은 희귀본도 몇 가지 끼어 있다. 이 밖에 법화경판목(法華經板木)이 불탁 한켠에 쌓여 있을 뿐이요, 다른 아무 불상이 없음은 미상불 소조한 생각이 든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도 실상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변산 가운데에 있다. 본조(조선) 세조 때에 중창하여 큰 절이 되었다. 절 북쪽에 또 부도암(浮屠菴)이 있다. 기준(奇遵)의 시가 전한다. 겹겹의 산봉우리 서쪽에 절 하나 있고 멀리 온 신선 같은 중이 숲속 좁은 길을 찾아 든다 물 찬 못에 햇빛 비치니 물고기 서로 희롱하고 푸른 나무에 가을 깊어지니 새 깃들이지 않는다 묏부리 그림자 누(樓)에 닿으니 절은 환하며 차갑고 샘에 비친 구름 전각(殿閣)에 잇닿아 불등(佛燈)이 흔들린다 향 타는 연기 아직 남았는데 중은 경(磬)을 울리고 옥 같이 둥근 이슬이 달 아래 환하다“ 그동안 ‘육이오 전란 중에 소실되었다.’는 막연한 문헌기록만 접해 왔는데, 육이오 당시 변산 빨치산이었던 고 김영권 선생으로부터 실상사가 불탄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51년 여름, 빨치산 토벌대들은 사자동 실상사에 진을 치고 변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변산 빨치산은 병력도 많지 않고, 화력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변산 빨치산을 통틀어 총은 15정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오랫동안 산 생활을 해 그곳 지형을 잘 아는데다. 높은 곳에서 아래의 적진을 훤히 내려다보며 싸우기 때문에 토벌대들은 빨치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빨지산에게 크게 패한 토벌대들은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는데, 후미가 막 빠져나갈 무렵 실상사에 불길이 솟았다고 한다. 이때의 작전명은 ‘봉래구곡작전’이었다고 한다. |
'종주 및 기타 > 전라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순(수락폭포, 마귀할멈 폭포) (0) | 2016.09.23 |
---|---|
변산(대불사 - 굴바위 상단 - 옥녀봉 - 덕성봉 - 가마소 - 사자동), 선계폭포 상단 (0) | 2016.07.17 |
대둔산(돗대봉 - 칠성봉 - 마천대 - 월성봉 - 바랑산 - 영주사) (0) | 2016.05.18 |
변산(중산마을 - 운산제 - 지름박골 - 대소마을 - 직소폭포 - 주차장) (0) | 2016.05.10 |
변산(남여치- 쌍선봉 - 낙조대 - 재백이 고개 - 관음봉 - 와룡소 - 굴바위) 그리고 선계폭포 (0) | 2016.05.04 |